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동문들이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등 미국 각지에서 학문과 산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는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동문들의 소식을 한국에서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유학 등의 이유로 미국에 진출해도 한동안은 주변 한인교회 등의 한인모임 이외의 장소에서 동문을 알기도 쉽지 않다. 이에 EE Newsletter에서 KAIST 발전재단 소속으로 미주동문회를 돕는 KAIST America에 대해 소개하고자 주동혁 동문을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졌다.
Q. 주동혁 동문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1974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KAIST (당시 KAIS, 한국 과학원). 전기 및 전자공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반도체를 전공했고 김충기 교수님의 지도하에 Charge Coupled Device를 설계 및 제작하고 특성을 측정 분석한 논문으로 석사 과정을 마치고1976년 2월 KAIST 석사 2회로 졸업했습니다.
Q. 어떤 계기로, 졸업 이후 미국으로 진출하게 되시고 또 실리콘밸리 동문회와 KAIST America가 출발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 KAIST 졸업 후, 1980년까지 삼성(당시 한국 반도체 주식회사)에서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로 일했습니다. 당시 한국 반도체 주식회사는 미국에도 대여섯 회사만이 보유하고 있던 CMOS 반도체 기술을 사용해 디지털 전자 시계칩을 설계, 생산하는 첨단 기술력을 가진 회사였습니다. 당시, 인텔(Intel)도 전자 시계 칩 생산에 뛰어 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천으로 출퇴근하느라 새벽에 집을 나서 밤 늦게 귀가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새로운 제품이 개발되는 재미에 힘든 줄 모르고 지내지 않았던가 싶습니다.
1980년 삼성반도체를 사직하고 미국 유학 길에 올라 미네소타 대학교 (University of Minnesota, Minneapolis) 에서 반도체에 대해 더 공부한 후 1984년 전기공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허니웰 사(Honeywell Inc.), AMD(Advanced Micro Devices)를 거쳐, 1980년대 하반기는 한국의 대기업들(삼성, LG, 현대 등)이 본격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고, 이에 많은 해외 기술인력들이 귀국했습니다. 저도 1989년에 귀국해 1993년까지 4년간 LG 반도체 (당시 금성 일렉트론)에서 DRAM과 SRAM 개발 담당 임원으로 일했습니다.
1993년에 LG를 떠나 다시 미국 AMD로 돌아 온 후 2007년까지 14년간을 근무했고, 2007년에 산호세(San Jose)에 유비모스 테크놀로지스(UbiMOS Technologies, Inc.)를 설립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 회사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fabless(반도체칩을 설계만 하고 생산하지 않는 회사)반도체 회사 등에 반도체 기술 개발, 기술 컨설팅 및 기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입니다.
Q. 해외에서 다년간 공부하고 근무하시면서 느낀 점을 바탕으로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반도체의 경우 산업의 무게 중심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으로 옮겨 갔으므로 해외에서 근무하는 이점은 예전처럼 크지 않다고 봅니다. 더구나 인터넷, 통신기술 등의 발전으로 정보 교환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므로 과거 실리콘밸리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기술개발은 이제 전 세계에서 분산되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지역적 특성을 감안해서 그 지역의 시장을 공략하려는 정보화 기술의 개발은 해외보다는 현지에서 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과 같이 빠르게 변하고 발전하는 기술 환경에서, 산업현장이 아닌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시대의 흐름에 압도되고 혼란스러울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전공 분야와 물리, 화학, 수학 등 기초과학에서 충실한 기본을 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어느 언론사에서 국내의 유수 이공계 대학교 학장 몇 명을 초청해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그 중 어느 학장이 한국도 이제 반도체 강국이니 반도체 교육을 고등학교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설득력있는 주장이지만 저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특징 중 하나인 “빨리빨리” 발상 중 하나라고 봅니다. 고등학생은 고등학교 졸업에 필요한 기본을 충실히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이는 대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튼튼한 목재는 가공하기에 따라서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기초를 충실히 하고 졸업하면 그 후에 원하는 분야 어느 곳에서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업체에서도 당장 필요한 분야에 쓸 수 있는 맞춤형 학생을 학교에 요구하는 단기적 안목을 버려야 한다고 봅니다. 오히려 필요한 분야에 맞도록 인재를 키우는 것은 기업체의 몫입니다.
학생이라는 신분은 매우 값지고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때를 지나면 체계적으로 배우고 공부하는 기회는 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중요한 시기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Q. 약 20년간 실리콘밸리에 계시며 실리콘밸리와 전자공학산업을 직접 경험하시면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전자공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A. 예전에 비해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첨단 기술의 산실로서 실리콘밸리의 역할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 든 역량있는 과학 기술자들, 그리고 기술과 시장을 읽을 줄 아는 벤처 투자가들이 많고 지금도 계속 유입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이점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 퇴색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지난 50년의 실리콘밸리의 발전은 눈부시다는 표현이 무리가 아닙니다. 이 곳에서 개발 및 상용화된 기술로 세상이 세 번은 바뀌었다고 봅니다. 반도체 집적회로가 전자 산업을 바꾸었고, PC가 컴퓨터 시장을 바꾸었고 인터넷은 사이버 세상을 만들어내며 세상을 뒤집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실리콘밸리에 기라성 같은 첨단 기술회사들이 등장했습니다. HP, 인텔(Intel), 애플(Apple), 오라클(Oracle), 야후(Yahoo), 구글(Google) 등이 대표적인 회사고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저력은 이처럼 새로운 첨단 기술을 상용화하여 성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성공한 대기업을 보는 것은 빙산의 일각만을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 밑에 있어 보이지 않지만 이들 기술을 받쳐주고 있는 기본적인 기술력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취약점으로 원천기술 부재가 흔히 지적되곤 합니다. 원천기술은 충실한 기반 기술과 기초 과학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모래 위에 성을 쌓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위에서 언급했던 “빨리빨리”로 표현되는 국민성을 최대한 잘 살려 단기간 첨단 기술의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빨리빨리”라는 국민성은 제조 기술, 생산 기술 등에 효과적일 수 있지만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는 오히려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름길은 없으니 기본적인 과학기술의 역량을 충실히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 첨단 기술의 추세인 융합 기술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융합 기술이 성공적으로 개발되기 위해서 융합하려는 각각의 분야의 기반기술이 튼튼해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상식적인 논리입니다.
Q. 실리콘밸리의 역사에 관한 장문의 글들이 KAIST America 웹사이트(www.kaistamerica.net)에 올려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내용의 글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 글을 KAIST 전자과 학생들에게 특별히 추천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A. 실리콘밸리에 오래 살면서 실리콘밸리의 역사와 과학 기술자들의 역할, 실리콘밸리의 부단한 저력과 앞으로의 위상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실리콘밸리가 2007년에 50주년을 맞았고 이를 계기로 글을 써서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실리콘밸리는 세계적으로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이제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현지에서 생활하며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고 독특한 실리콘밸리에 대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특히 이공계 기피가 심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할 때, 제 글이 이공계 학생들과 과학 기술자들의 자부심을 북돋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반도체 초창기에 일했던 경험과 그 후 실리콘밸리에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써서 가능하다면 책을 출간하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 제목은 가칭 “실리콘밸리 반세기의 기술 혁명 – 세상을 바꾼 과학기술자들과 그들의 기업” 입니다. 책 출간을 준비하는 동안 우선 이 글을 KAIST 동문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에서 KAIST America 웹사이트에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고 KAIST 졸업생뿐 아니라 KAIST 학생, 교수 등과도 이 글을 나누기 위해 제가 졸업한 전자과를 생각하게 되었지요.
Q. 마지막으로 KAIST 전자과 학생들과 이 글을 읽는 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실리콘밸리 역사는 50여 년에 불과하지만 이 곳에서 일어난 기술혁명으로 세상이 새롭게 변모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다양한 첨단기술들을 접하다 보면 개발의 당사자인 과학기술자들도 압도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 한 기술혁명은 계속될 것입니다. 실리콘밸리의 기술혁명은 바로 꿈과 열정을 가진 과학기술자들이 이룬 결과입니다.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성공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일에 대한 열정”을 충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네소타 대학원 시절 얘기 한가지 하자면, 박사 과정에 들어 가려면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미네소타 대학의 경우 네 개 과목을 선택해서 각 과목의 시험 담당 교수를 찾아가 일대일로 구두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는데, 그 중 어느 교수가 제게 한 말이 아직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동양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그 교수는 시험이 끝난 후 “You are very well educated.” 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습니다.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KAIST에서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니 여러분들도 모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KAIST America는?
KAIST America는 현재 한국 KAIST 발전재단에 소속된 미국 동문회로 2008년 6월에 이종문 AmBex Venture Group 회장의 후원으로 사무실을 써니배일(Sunnyvale)에 개소했으며, 현재는 산호세(San Jose)에 위치해 있다. KAIST America의 주된 활동은 KAIST 발전기금 조성과 연구 및 교육 국제협력 촉진이다. 현재 KAIST America 웹사이트(www.kaistamerica.net)에는 9월 20일자로 427명의 동문들이 가입해있고, 대부분 미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하는 동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 동문회 모임 및 동문회 골프대회 등 다양한 동문활동들이 진행되고 있으며, 해당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정보(취업, 세미나, 실리콘밸리 혁신 역사 특강, 특허법, 부동산 등)가 공유되고 있다. 미 전역의 동문간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각지의 동문회 결성도 지원하고 있으며, 같은 지역에 있는 실리콘밸리 동문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바쁘신 와중에도 취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신 주동혁 동문과 임진우 동문께 감사말씀 드립니다.
천유상 기자 / usang2vv@kaist.ac.kr